(홍콩=데일리홍콩) 김한국 기자 = AI가 똑똑해질수록 발목을 잡는 것은 역설적으로 ‘메모리’다. 방대한 데이터를 기억하고 불러오는 데 필요한 전력과 반도체 저장 용량 등 메모리 성능이 AI 성능 향상의 가장 큰 걸림돌로 꼽혀왔다. 본지는 앞서 이 병목을 풀기 위한 중국 푸단대의 ‘상온 단전자 메모리‘(7월 30일자)와 구글의 AI 메모리 압축 기술 ‘터보퀀트‘(3월 28일자)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홍콩이 직접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홍콩대학교(HKU) 연구진이 미국 휴렛팩커드 랩스(Hewlett Packard Labs)와 손잡고, 사람의 뇌처럼 ‘연상 기억’이 가능한 차세대 AI 반도체를 개발하면서, 필요한 소자 수는 95%까지 줄이고 기억 용량은 오히려 2배로 늘리는 데 성공했다.

‘연상 기억’이란?

노래 몇 소절로 곡 전체를 떠올리는 능력

일반 컴퓨터 메모리(RAM)는 정보가 저장된 정확한 ‘주소’를 알아야만 데이터를 꺼낼 수 있다. 반면 사람의 뇌는 다르다. 노래 몇 소절만 들어도 곡 전체가 떠오르고, 얼굴의 일부만 봐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챈다. 이렇게 단서(cue)의 일부만으로 전체 정보를 복원해내는 뇌의 능력을 ‘연상 기억(associative memory)’이라고 부른다. 패턴을 알아보고, 오류를 스스로 바로잡고, 얼굴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AI 기능의 핵심이 바로 이 원리에 기반한다.

문제는 이런 연상 기억 방식의 반도체는 저장하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서로 헷갈리기 쉬워, 지금까지는 저장 용량을 늘리려면 무조건 반도체(네트워크) 크기 자체를 키워야 했다는 점이다.

불완전한 반도체 소자, ‘고치는 대신 끌어안았다’

HKU 연구진이 주목한 소재는 ‘멤리스터(memristor)’다. 메모리(memory)와 저항(resistor)을 합친 이름처럼, 별도의 전원 공급 없이도 이전 상태를 스스로 ‘기억’하는 차세대 반도체 소자다. 다만 실제로 만들어진 멤리스터 칩은 소자마다 미세한 결함이 있어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었다.

연구진은 이 결함을 없애려 하는 대신, 칩 하나하나의 실제 결함을 미리 측정하고 이를 학습 과정에서 그대로 반영해 보정하는 ‘하드웨어 적응형 학습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이를 여러 층으로 쌓은 다층 네트워크 구조와 결합해, 실제 멤리스터 하드웨어에서 처음으로 이 용량 한계를 깨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연구진은 “실제 하드웨어는 결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결함과 싸우는 대신 시스템이 그 결함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쳤다”며 “알고리즘과 하드웨어를 함께 설계함으로써 더 많은 기억을 저장하면서도, 일부 소자가 고장 나도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소자 95% 줄이고 용량은 2배… “고장에도 끄떡없다”

이번 연구 결과, 같은 시스템으로 이진 데이터와 연속값 데이터를 모두 처리하면서도 필요한 소자 수는 최대 95%까지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저장 용량은 기존 최고 기록 대비 약 2배로 늘었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반도체 크기를 키운 것보다 저장 용량이 더 빠르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보통은 반도체 크기를 2배로 키우면 용량도 딱 2배 느는 데 그치지만, 이번 칩은 크기를 키운 정도보다 용량이 더 많이 늘어나는 ‘효율 체증’ 현상을 보였다. 기존의 단순한 구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성이다.

속도가 빨라진 비결은 ‘한 번에 전체를 업데이트’하는 방식에 있다. 기존 반도체가 정보를 한 줄씩 차례로 읽고 쓴다면, 멤리스터는 마치 은행 창구 여러 곳이 동시에 손님을 받듯 칩 전체의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이 덕분에 기억을 불러오는 속도는 최대 99.7% 단축됐고, 에너지 효율은 최대 8.8배 향상됐다.

웨어러블·엣지 기기 정조준

데이터센터 없이도 AI 구동

연구진은 이번 기술이 스마트폰, 센서, 웨어러블 기기처럼 전력 공급이 제한적인 ‘엣지 AI’ 환경에서 특히 유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데이터센터에 의존하지 않고도 안정적이고 저전력으로 작동하는 AI 하드웨어의 길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 논문 ‘A hardware-adaptive learning algorithm for superlinear-capacity associative memory on memristor crossbars’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게재됐다. 연구 배경과 참여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출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A hardware-adaptive learning algorithm for superlinear-capacity associative memory on memristor crossbars)

앞서 본지가 짚었던 것처럼,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은 ‘더 작게 깎는’ 미세공정 경쟁에서 ‘소재·소자 구조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중국(푸단대), 미국(구글)에 이어 이번엔 홍콩 현지 대학이 이 흐름에 직접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이번 성과는 홍콩의 반도체·AI 연구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눈여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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