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데일리홍콩) 김한국 기자 =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에서 여성의 능력과 권리를 상징하는 문구로 사용돼 온 이 표현이 이번에는 국방의 의무를 둘러싼 새로운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군 복무 역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현행 병역의무를 여성에게도 확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온라인을 넘어 실제 시민운동과 거리 집회로 구체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징병제 도입을 요구하는 한 시민단체는 오는 8월 30일 일요일 오후 2시 서울 강남역 9번·10번 출구 사이 ‘바람의 언덕’에서 여성 징병제 촉구 집회를 개최한다고 예고했다.
주최 측은 공개한 영상을 통해 이번 집회를 여성 징병제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를 위한 첫 행사로 소개하고, 향후에도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어 여성 징병제를 정치권의 주요 의제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집회에서는 전투복 착용과 행진 등의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이번에는 병역 문제
‘GIRLS CAN DO ANYTHING’은 원래 패션 브랜드가 사용한 문구였지만, 2018년 걸그룹 에이핑크 멤버 손나은이 해당 문구가 적힌 휴대전화 케이스를 SNS에 공개한 뒤 한국 온라인 공간에서 페미니즘과 연결된 논쟁이 벌어졌다.
이후 이 문구는 한국의 디지털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능력과 권리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번 여성 징병제 운동은 이와 같은 ‘성별이 여성의 활동 영역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평등 논리를 국방의 의무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최 측은 여성도 경찰·소방관 등 다양한 공공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군에서도 장교와 부사관으로 복무할 수 있는 만큼 병사로서의 복무 역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남녀 사이에 평균적인 신체능력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과 여성 개개인의 군 복무 가능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개인의 신체능력에 따라 보직을 배치할 수 있으며, 군에는 전투 임무 외에도 행정·보급·통신·정비·급양 등 다양한 업무가 있다는 논리다.
주최 측은 저출산으로 병역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남성만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의 지속 가능성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병역자원 감소 속 여성 징병제 찬성 59.6%
여성 징병제 논의가 다시 주목받는 배경에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다.
정부는 저출생으로 인한 병역자원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현행 징병제와 모병제를 결합한 선택적 모병제 도입을 국방개혁의 주요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저출생으로 인한 병역자원 감소를 언급하며 인력 중심의 군 구조를 기술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조사에서는 여성 징병제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찬성 여론도 확인됐다.
개혁신당 정책연구기관인 개혁연구원이 지난 8월 18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병역제도 개편 국민인식조사에서 여성도 징병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은 59.6%, 반대는 34.0%로 나타났다.
성별로 보면 남성의 찬성률은 64.8%, 여성은 54.5%로 남녀 모두 과반이었다. 특히 20·30대 남성의 찬성률은 71.7%로 전체 집단 가운데 가장 높았다.
또한 향후 병역제도의 방향을 묻는 조사에서는 징병제와 모병제를 병행해야 한다는 응답이 41.5%로 가장 많았으며, 현행 징병제 유지 35.4%, 전면 모병제 전환 10.6% 순이었다.
현행법상 남성만 의무복무…헌재는 합헌 판단
현재 한국의 병역법상 대한민국 국민인 남성은 병역의무를 수행해야 하며, 여성은 지원에 의해서만 현역 및 예비역으로 복무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2023년 남성에게만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병역법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균적인 신체적 차이와 국가안보, 군의 전투력 확보 등을 고려할 때 남성에게만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도 헌재는 장기적으로 출산율 변화에 따른 병역자원 수급 등을 고려해 양성징병제 도입이나 모병제로의 전환에 관한 입법 논의가 검토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제시했다.
즉 현행 남성 징병제가 합헌이라는 판단이 여성 징병제에 대한 입법 논의 자체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성도 의무복무
여성 징병제를 둘러싼 한국의 논쟁에서 대표적인 국제 비교 사례로 거론되는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여성에게도 법적으로 군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다. 이스라엘 외교부에 따르면 병역 적합 판정을 받은 18~29세 남성과 18~26세 여성에게 정규 군 복무 의무가 적용된다. 다만 여성에게는 남성과 다른 면제 및 복무 조건이 존재한다.
이스라엘군(IDF) 역시 여성 징집을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군사제도의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성들은 전투를 포함한 다양한 군사 분야에서 복무하며, 최근에는 일부 직무에서 남성과 동일한 복무기간을 적용받는 사례도 있다.
다만 이스라엘의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양국은 안보환경과 인구구조, 병역제도, 여성의 복무조건 등이 서로 다르다.
이스라엘 사례가 한국의 논쟁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여성을 군 복무 대상에서 원천적으로 제외하지 않는 징병제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온라인 논쟁에서 거리의 운동으로
이번 집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여성 징병제에 대한 주장이 단순한 온라인 논쟁을 넘어 실제 조직과 거리 집회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최 측은 30일 첫 집회를 시작으로 여성 징병제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참여자를 확대해 정치권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한국에서 병역 문제는 단순한 국방정책을 넘어 젠더 평등과 청년 세대의 형평성, 저출산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가 동시에 얽혀 있는 민감한 사회적 의제다.
특히 병역자원 감소가 현실화하면서 논쟁의 초점도 ‘남성 징병제를 유지할 것인가’에서 ‘누가 국방의 의무를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오는 30일 강남역에서 예정된 집회가 일회성 행사에 그칠지, 여성 징병제 도입을 요구하는 지속적인 시민운동으로 발전할지는 향후 한국의 병역제도 논쟁에서 주목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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